김익두 목사

장로교 목사이자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金益斗)는 1874년(고종 11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아버지 응선(應善)과 어머니 전익선(田益善)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으며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김익두는 한때 상업에 종사했으나 실패했으며,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서 유산을 탕진하는 등 어려움을 겪자 삶에 회의를 느꼈다.

20세 이후 청년시절에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싸움과 술주정을 일삼아, 인근 고을에서 ‘개망나니 김익두’로 불릴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27세 되던 1900년 봄에 김익두는 친구 박태환(朴泰煥)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던 금산교회에 갔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Swallen, W.L.)의 ‘영생'(永生)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신약성서를 1년에 100번이나 독파하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변모하였다. 그후 1901년 7월에 김익두는 부인,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스왈렌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친구의 강권에 못이겨 술을 마시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뛰쳐나온 김익두는, 산에 들어가 대성통곡하며 회개기도를 하는 가운데 큰 불덩이가 몸에 떨어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이 때 ‘가슴을 칼로 찢는’것 같은 성령의 내적 임재(臨在)를 경험한 그는 다시는 약해지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김익두는 1901년 10월 재령(載寧)교회 전도를 위해 헌신하라는 스왈렌의 권유를 받고 교역사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스왈렌으로부터 전도실력과 신앙을 인정받은 그는 1903년에는 신천(信川)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신천에서도 그는 새벽기도, 신약과 구약을 하루에 각각 2장씩 숙독, 냉수마찰, 가정에서 하루 3번 예배 등 스스로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항상 손에 성경을 들고 틈 나는대로 읽었으며, 길을 걸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습관이 생길 정도로 열중하였다. 김익두는 1906년 3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다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1년 어느 날 김익두는 마가복음 9장 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에 홀연히 확신을 얻고, 신유(神癒)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힘써 기도하다 마침내 신유의 기적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보혈에 의한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重生)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 등이 중심이었는데, 설교에 나타나는 신비스런 능력과 매력에 청중들이 도취되었다.


1919년 가을부터 김익두는 서울의 남문밖교회에서 이재형과 함께 시무하였다. 이곳에서 김익두의 겸손한 태도와 기도생활, 능력있는 설교, 성경사랑과 해박한 지식 등이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는 여러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1919년 10월 강동(江東) 염파교회의 사경회에서 본격적인 신유의 능력을 갖춘 그는 그뒤 많은 난치병을 고쳤다. 기록상에 나타난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 사경회 때 턱이 떨어진 박수진(朴守眞)이라는 걸인을 낫게 한 일이다. 이후 1920년 4월 영남지방 집회 때에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그는 ‘권능(權能)의 사자(使者)’로서 전국에서 부흥회를 열면서, 도처에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을 일으켰다.


1920년 6월 31일 평양의 연합부흥회에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6,000여명이나 몰려 들었다. 이후 그가 제 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된 후 그 해 10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2주일간 열린 연합부흥회에는 연인원 1만여명이 참석하여 철야기도를 올리며 통회자복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김익두는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17년 된 혈류증 환자가 쾌유되며, 소경이 눈을 뜨는’ 이적을 일으킨 인물로 소문났다.


한편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로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기독교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김익두 등의 부흥사들을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2년 5월 9일자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체현하는 것보다 미설(迷說) 기적을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한편 황해노회에서는 1919년부터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중심이 되어 ‘김익두 목사 이적증명회’를 구성하고 3년동안 그를 통해 치유받은 자들의 신상과 기록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21.7)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근거로 황해노회는 1923년 총회에서 “금일에는 이적(異蹟)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1조를 수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 건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 총회를 계기로 김익두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다. 총회의 ‘이적 불인정’은 그가 여는 부흥회의 의미를 감소시켰고 당시 교회내 지식계층이나 일반 사회주의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익두의 부흥운동은 급격히 냉각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사태를 주시한 그는 이후로는 병을 고치는 이적을 삼갔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익두는 일본경찰에 강제로 연행되어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를 기독교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선전자료로 삼았다. 그러나 1942년에는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15일간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는 함구령을 내려 그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직전리에 있는 과수원에 가두고 목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광복후 북한에서는 1946년 11월에 어용기구로 기독교도연맹이 만들어졌다. 당시 김익두는 이 단체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1949년에는 그를 기독교도연맹 총회장에 임명하였다. 이는 그의 제자이자 김일성의 이종사촌인 전 목사 강양욱(康良煜)의 강권과 감언이설에 의한 것이었다.


1950년 10월14일 새벽 김익두가 신천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 후퇴하던 인민군이 난입하였다. 인민군들은 쫓기는 화풀이로 그를 총살시켰으며, 이 때 이를 말리던 신도 5명도 함께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교회정원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29일 신천군 제직회 주최로 신천지역 50여개 교회가 모여 서부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려 50여년 동안 김익두는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50여 곳에 새로 교회당을 세웠다. 또한 2만 8000여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아니라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아울러 그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르렀다.


그가 남긴 저작으로는 부흥회 설교 13편을 모은 ‘부흥회설교집'(1940년)이 있다. 김익두는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가로서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표하는 ‘이적의 부흥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3·1운동 뒤 민족적 좌절을 겪고 사회변화와 각종 이데올로기의 대두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폐허의 한국교회에 영적인 재각성을 도모하여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며, 신유의 신앙운동으로 재기의 에너지와 열기를 주었던 목사였다.


아울러 그는 19세기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Moody, D.L.)에 비견하여 ‘한국의 무디’로 평가되었다. 또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여 ‘과학을 초월한 불가사의를 행한 자’ ‘신비의 잠을 깨운 자’ 등으로 불리며 이후 한국교회의 독특한 부흥회의 전범을 마련한 영적 능력을 지닌 목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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