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한국 그로서리에서 장을 보다, 등이 구부정한 할머니가 등에 영어로 “그레잇 캐치”라는 문구와 그 밑에 큰 물고기 그림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장을 보고 계신 모습을 보고 둘이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장난꾸러기 손자가 사준 선물일까?

나도 이제 생각하기도 싫은 60이라는 나이를 넘었으니, 그런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젊음의 싱싱함은 온데간데 없고 헐 값에 내놔도 팔기 어려운 노년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래도 슬프지 않다. 하나님 눈에는 내가 아직 “그레잇 캐치” 이니까. 늙고 병들어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도, 균이라도 옮을까 사람들이 멀리하는 홈리스도 또 심지어는 큰 죄를 짓고 들통나 매스컴에 얼굴이 도배되는 범죄자들도 모두 그 분 에게는 “그레잇 캐치”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정말 그레잇 캐치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레잇 캐치” 라는 티셔츠를 입고 잡히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 하나님, 커튼 뒤에 숨어서 그 밑에 다리와 발을 내 보이시며, “나 여기있다!”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머리 속에서 그려본다.
그 분은 Great Catch, 즉 “월척”이 분명하지만 월척이 아닌 우리를 그렇게도 잡고 싶어하신다. 제자들에게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라하신 예수님.

야고보가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고 안 놓아줄 때, 그 것이 기뻐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
성경책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릴 때 매우 자주 쓰시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구냐. 종살이하는 너희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게 나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노예였던 너희들을 내가 해방시켰다. 출애굽기 20장 2절
기도는 그런 것이다. 내가 그 분을 잡고, 그 분이 나를 잡는 만남. 이마누엘 하나님과 함께함을 이루는 시간. 혼잣말이 아니고,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능력으로 어떤 에너지나 파워를 우리에게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통해 알게된 인격체이신 그분과 직접 만나는 일이다.
거창한 내가 아니라, 신 앞에 선 피조물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단순 솔직한 기도의 말을 시작하면, 독백으로 시작한 기도를 이끌어 주고 응답하는 성령님과의 놀랍고 감동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된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그물을 던져보라. 오늘 성과가 없었으면 내일 다시. 또 다시. 월척을 잡을 때까지.
그 분을 잡아야, 그 분께 잡혀야, 비로서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을 수 있으니까. 특히나, 악한 세력이 우리를 사로잡아 번호를 매기고 추적자를 심어 노예삼으려는 이 무서운 때에, 우리는 손을 뻗쳐 그 분의 옷자락을 꼭 붙잡아야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이 곳에서 그 분이 데리고 나가는 무리 속에 들어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