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호의 그림을 보면, 혼란스러웠던 그의 내면을 반영하는 듯 하다. 그가 그린 그림에는 사람도 집도 나무도 길도 그리고 하늘까지도 흔들리고 있다. 그렇지만 그냥 좌우로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 흔들림이 움직임이 되고, 삐뚤빼뚤한 선이 하늘을 향하여 뻗어나가는 듯하다. 가난, 고독, 그리고 정신병의 삼재를 겪으며, 그래도 그는 캔버스 앞에서 만큼은, 주인 의식을 갖고 굵직한 붓 터치로 자신의 그림에 온전한 골격과 질서를 부과하려는 시도를 한 듯하다.
특히 나는 반 고호가 굵은 선으로 뚜렷하게 강조한 그의 모델들의 옷깃이 마음에 든다. 단정한 칼라는 human dignity,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듯하다. 삶에 지친 거친 얼굴을 가진 사람들에게 반 고호는 단정한 칼라를 부여하고, 때로는 멋진 모자도 얹어준다. 배경과 구분되는 그들의 눈동자가 살아있다.
말년에 길을 잃은 듯해 마음 아픈, 그의 젊은 날에 가졌던 신앙이, 그에게 경건함과, 가난한 사람들을 주인공 삼은 따뜻한 시선, 끊임없이 연습하고 노력했던 성실함, 자신의 귀를 자른 후 붕대로 동여맨 정신병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솔직함, 그리고 열정과 환희로 이어졌을 세상의 아름다운 선과 색채를 정확하게 감지하는 맑은 눈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고호의 대담한 붓 스트로크와 단정한 옷깃을 생각하며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이를 가르치는 기독교의 신앙인으로서 나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본다.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 8편에서 다윗 왕은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신경을 쓰고, 찾아가십니까? 우리를 천사들 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영광과 명예의 관을 씌워주셨나이다. 당신의 손으로 지은 모든 것의 주인 삼으시고, 양과 소, 들짐승, 하늘의 새와 바닷 속 물고기 이 모두를 우리 발 아래 두셨나이다.”라고 노래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에 씌워주신 관인데, 현재 우리는 가축처럼 여기저기 몰리고 쫓기며, 추적자의 낙인을 찍히며, 지구 자원을 축내지 않도록 “풋프린트”를 줄이라는 압박을 받고있다. 숨쉬고 존재하는 자체를 미생물에게까지 사과해야 할 판이다. 인류 전체를 향한, 그리고 특히 기독교 신자들을 겨눈 칼바람이 날로 사나워지고 있는 지금, 겨울나무 처럼, 꿋꿋이 서 이를 맞을 준비를 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보통 교회에 갈때, 나는일할 때 입는 정장을 입고가곤 했는데 어느 날, 교회에서 만난 친구가 공무원 복장같다고 놀리며 좀 더 캐주얼한 옷을 입으라고 충고했다. 그 후, 교회 갈 때는 정장을 안 입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입고갈 옷이 마땅치 않고 예배시작 시간이 임박해, 정장을 입고 갔다. 그날 예배 후 새 목사님을 청빙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후보자와 예배 후 교인들과 질의문답 시간을 갖는다는 광고를 듣고 그냥 집에 갈까하다 그래도 중요한 일이니 잠시 들러 살펴보기로 했다.
떠나는 목사님과 나란히 앉아서 단독 후보인 젊은 목사님이 교인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화기애애 했다. 그 분의 아이비리그 학위, 완벽한 이중언어 구사 실력, 그리고 신학 입문 전 프라이빗 섹터에서의 화려한 경력 등이 소개되었다. 교인들의 질문은 주로 앞으로 교회 프로그램 운영 계획 등에 대한 것으로, 그의 부임은 이미 결정된 듯 했다. Q&A시간이 거의 끝나가도록 담임목사의 적합성을 판단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나는 용기를 내 손을 들고, 교회 내에 들어온 반 기독교 사상인 다원주의 즉 구세주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에큐메니즘에 대한 목사님의 입장을 물었다.
매우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불편하게 하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바로 답을 못하더니 너무 “수준높은” 질문이라 “우리가 알아듣도록” 생각을 좀 정리해서 답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나의 질문 후, 다른 교인 몇 명도 손들고 관련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궁금했던 건 나만이 아니었던던 것이다. 그 날, 내가 계획에도 없이 정장을 입고 교회에 갔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단정함 하면, 반 고호의 옷깃과 함께 머리 속에 종종 연상되는 이미지가 오래 전에 본 모짜르트의 생애를 영화화한 ‘”아마데우스”의 첫 부분에 나오는 장면이다. 훗 날 그의 부인이 된 콘스탄체와 방바닥에서 몸을 부벼대며 희희낙낙 사랑놀이를 하던 그가 어디선가 자신의 음악이 들려오자 벌떡 일어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음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장면.
모짜르트 처럼,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비록 현재의 생활이 안정되고 다양한 취미와 사교 등으로 즐거운 것일지라도, 창 밖의 세상에 어둠이 가득하고,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면 희희낙낙, 뒹굴뒹굴하던 방바닥에서 일어나, 엔터테인먼트를 끄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가야하지 않을까. 고호에게 미술이 그랬듯이, 모자르트에게 음악이 그랬듯이, 기독교인에게 신앙은 취미가 아닌 본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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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Vincent
Your Impractical green eyes
Never came to senses
A missionary who believed in what he preached
A winter tree
Suffering from exposure
Shaken to the point of broken
Yet its branches are all raised up
A maestro
Ready to conduct
Thick black Lines of surety
Colors of purity
Bluer sky
Brighter stars
Greener pastures
Prettier red
Yellow light to warm up the whole world
Words to show what you see
Selfies with green eyes still alive
A pauper with offering hands
Honest hands that worked all of his life
Busy at work with unsellable ware
Leaving them all behind
Like a rich man
To undeserving hei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