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아름답게

“반짝반짝 빛난 눈동자
앵두 같이 예쁜 그 입술
아장아장 걸음마하며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납니다.”
– 임정은 작사, 작곡 –

 

 

오래 전 아버지가 작사 작곡하신 동요인데 어릴 때 부터 노년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끔씩 이 노래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불러보곤 했다.

나는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나?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고, 그렇지 못함이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제는 아이들이 착하고 아름답게 자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음이 안타깝기도 하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살아있는 생명체는 신비롭다.  한 갖 들풀 조차도 전에는 없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나 싹이 돋고 자라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특히 우리 인간의 경우, 신체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력, 창조력 등이 계속 발달해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지금은 대세인 인공지능 수업을 듣고,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 가에 대한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썼는데, 당시에는 튜링 머쉰이라는 기계가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의 뇌 기능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물 인식을 하게 하는 것도 참 힘겨운 작업이었다.

기계와 달리 동물은 노력하지 않고도 사물을 인식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반응하여 위험으로 부터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고 먹이를 구하는 등의 행동을 한다.  인간도 그렇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 말을 배우면서 부터 추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사과를 보고 그 모양과 색깔만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 바나나는 과일이고 샐러리, 당근은 야채라고 분류할 수 있고, 한 단계 더 올라가 과일과 야채는 음식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 분류해 갈 수 있다.

인간의 추상적 사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의미를 추구한다. 즉, 코비드 사태와 같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나와 내 식구, 사회 및 인류 전체에게 어떤 뜻이며 어떠한 영향을 미치나, 혹시  위험한 상황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그 것이 우리에게 좋은 일인가 나쁜일인가를 알아보려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어떤 행위나 결정이 옳은가 그른가를 묻고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사고를 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생존만을 위한 기능을 훨씬 능가하는 우리 인간만이 하는 경지의 사고인 것이다.

현재는 AI 분야가 발전해서 추상적 분류 및 계산을 빠른 속도로 하게되었으나, 의식이 없는 기계는 스스로 사고할 수 없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입력이 필요한 무생명체인 것이다.  카메라가 인간의 눈을 모방해서 만들어졌듯이,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단지 기계의 인간 모방내지 흉내임을 보며, 창조주와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만든 기계사이의 능력의 엄연한 위계질서가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도덕성이 결여된 하위 단계의 기능을 인간보다 빠르고 효율성있게 수행하는 것은 그러한 기능이 소수의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고 컨트롤하는 도구로 사용할 때 해가될 뿐이다.

인간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씨앗 처럼 물을 주고 키워야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기계나 동물은 그 기능이 사전에 프로그래밍 되어 입력에 따라 일정한 출력이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시고 자유의지 갖도록 특별하게 설계하신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지적 능력과 함께 도덕성도 키워나가지 않으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우리 각자 인생의 변화가 항상 대나무처럼 곧게 위로만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안일함 등으로 자기  개발의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교만, 질투, 탐욕 등 마음 속으로 죄를 지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할 수 있고, 그러한 성향이 범죄 행위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높은 지적 능력의 소유자도, 부와 명예를 성취한 사람도, 부정부패, 성범죄, 알콜/마약 중독 등의 죄를 저지르며 자신과 가족을 파탄에 빠뜨리기도 하는 걸 보면, 지적 능력과 함께 도덕성도 함께 자라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을 잃게됨을 본다.

작물을 키우듯 조심해서 물주고 가지치며 키워야 줄기가 곧게 자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되는 것이다.   약 50년 전에 실시된 TV 프로그램에 노출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수십 년간 추적한 연구에서 어릴 때 부터 하루에 한시간 이상 TV에 노출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 보다 공격적 성향이 있는 성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결과가 나온 연구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휴대폰과 게임 등을 통해  그러한 연구가 실시된 당시보다 훨씬 수위가 높은 폭력과 성적 문란함이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는 이 시대에 그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 답을 알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는 의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이 아름다운 성장을 계속해갈 수는 할 수는 없으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갖고 태어난 원죄에 대해, 그 죄성이 어떻게 우리의 올가미가 되고 계속 우리를 부패의 길을 걷게 하는 지 그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엄마의 몸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왔을 때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여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만으로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우리 스스로 죄성을 벗고 의로워질 수 없기에 이를 해결해 주시고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를 착하고 아름답게 키우려고 차근차근 반복해서 설명해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부모이기 전에 자식인 우리가,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그 가르침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따를 때 나 자신도 평생 곧은 성장을 계속하면서 자식의 입에도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곧고 아름답게 성장 할 생명의 양식을 먹여줄 수 있게되는 것이 아닐까?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는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물 있는 강가에 심은 나무 곧 제 철에 열매를 맺는 나무 같으며 그의 잎사귀 또한 시들지 아니하리로다.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형통하리로다.  시편 1:1-3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태복음 4장4절

 

* Early Exposure to TV Violence Predicts Aggression in Adulthood Huesmann, L. R., Moise-Titus, J., Podolski, C., & Eron, L. D. (2003). Longitudinal relations between children’s exposure to TV violence and their aggressive and violent behavior in young adulthood: 1977-1992. Developmental Psychology, 39, 2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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