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김명현 박사의 “창조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적 증거”를 보고

며칠 전 자다가 남편이 심하게 코를 골아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이럴 때를 대비해 마련해 둔 다른 방의 침대로 이동해,  잠을 청하려고 누워서 랩탑을 키고, 김명현 교수의 “창조과학: 창조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적 증거”라는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다. 

영어로된 비슷한 내용의 영상을 보고난 후,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한국어로된 영상을 찾아 놓고 너무 길어서 보기를 미뤄 왔던 것이다.  천천히 보다가 잠들려고 한 건데 보다가 잠이 다 달아났다.  끝부분에서는 눈물도 났다.

보면서 강의를 쉽게 하려고 농담을 많이하고 듣고 있는 사람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 같아 약간 거부감이들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 내용이 항상 생각해오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감동적이었다.  사람들은 대학교수라든가 박사의 말을 권위있고 믿을만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엄연한 진실이나 사실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박사와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사실을 지적하는 김교수의 말이 시웠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 “하나님, 거기 계셨군요!”를 나도 기계와 대비되는 인간의 사고과정에 대한 논문을 쓰며 속으로 외쳤었다.  김교수 처럼 나도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나 스스로 탐구하고 발견하기 까지 신앙은 내가 먹은게 아니라 벽에 걸린 그림 속의 떡같은 존재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에 비해 지능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의 두뇌가 얼마나 정교하고 우수하게 만들어졌으며, 추상적 사고를 통해 도덕성 및 진리를 추구해가는 사고과정을 관찰하며, 김교수가 보여준 로보트 팔과 인간의 팔, 손가락의 움직임 처럼, 나도 인간의 능력과 확실히 구분되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보게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모방할 수는 있지만, 결코 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지금과는 달리 내가 AI수업을 들었던 1991년 당시, 튜링머신이라는 AI 기계는 인간 사고의 가장 낮은 수준인 물체인식 단계도 제대로 카피하지 못해 쩔쩔매는 수준이었다.  인간의 눈을 모방한 카메라를 보더라도, 아무리 비싼 카메라라도 인간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그대로 캡쳐할 수 있는 카메라는 없다.

상대적 진리, 포스트 모더니즘 등이 대세인 학교에서, 나의 논문은 실험을 통해 증명하기 까지, 지도교수조차도 회의적으로 받아들였었다.  특히 나에게 “나는 인간이 생각이나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만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며 “설령 인간이 사고라는 것을 한다고 해도 수십년 동안 내가 쌓아온 이론에 반하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한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저명한 교수를 잊을 수가 없다. 충격이었다.  대학원에 다녔어도 나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백팩에 넣고 다니며 읽었던 성경책이었다.

그 후, 김명현 교수와 같은 기독교 지식인들 특히 과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깨닫게 된 것은, 비록 극히 소수이지만, 각기 다른 분야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다는 사실이다.

몇년 전, 찜질방에서 만난 어느 미국인 불교신자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그녀는 자신도 교회에 가봤는데, 하나님을 손들고 찬양하는 부분에서 거부감이 들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가짜로 행동하는 것 같다고.  나는 그녀의 솔직한 발언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 것이 속상하고 미안하다.

그녀와 같이 솔직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진실된 믿음과 구원을 얻게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을 던지고, 바로 내가 답하는 교만함이 아니라, 공부하는 자세로 답을 찾아보는 수고를 한다면, 그 끝에 찾아낸 것을 들여다보고 놀라, 탄성과 찬양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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