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국 컴패션 웹사이트에서 오래된 큰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다. 컴패션 설립자 에버렛 스완슨 목사님 뒤에 들러리 처럼 멀리 서 계셔, shallow depth of field(특정 인물이나 사물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흐릿하게 만드는 사진 테크닉) 영역에 큰아버지가 계셨다. 모습 조차 긴가 민가 했지만, 또 하나 발견한 스완슨과 큰아버지의 사진에서 먼저 모습이 큰아버지 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컴패션은 스완슨과 큰 아버지가 만나 함께 만드신 것으로 안다. 1951년, 큰 아버지는 일본 동경 제대에서 서양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셨고 이제 막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스완슨씨가 부산에서 만나, 두 사람 다 얼어 죽거나, 굶은 채 거리를 떠 도는 고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아이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로 의기투합해 고아원을 세우자고 했다.
스완슨은 시카고 모 교회로 돌아가 상황 설명을 하고 선교 보다 우선 죽어가는 아이들 부터 살리자고 교인들을 설득해 돈을 거둬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동경 유학시절 부터 가난했던 큰 아버지는 스완슨이 설립한 미국 자선 단체에서 돈을 받아 고아원을 운영했다.
나는 컴패션이 큰 아버지를 공동 설립자로 인정해주지 않는게 속상했었는데, 그런 생각이 얼마나 세상적인 생각인지 깨닫게 되었다. 큰 아버지는 자신을 알리거나 인정받으려는 노력을 전혀 안하셨다. 그 분은 목사였던 아버지에게서 신앙을 물려받은 맏아들로서, 아이들을 사랑했고,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화가의 길 포기했다.
내가 늦은 나이에 취미로 유화를 해보니, 정식으로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되고, 취미로 그리는 유화에도 심취되어서 포기 못할 거 같은데, 정식으로 공부한 큰아버지는 어찌 포기하셨을까.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흐려진 눈과 떨리는 손으로 처음으로 다시 붓을 들어 그리신 수채화를 내가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큰 아버지가 희생만을 하며 재미없게 사신 건 아니다. 광안리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탱자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넓은 부지에 보육원을 얼마나 아름답게 지으셨던지. 새벽마다 아이들을 깨워 기도와 설교 그리고 직접 찬송가 반주를 하며 예배를 보셨다. 예배 시작 전 손을 푸느라 하농을 치곤 하셨는데, 방학 때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옆 방에서 자던 우리 남매도 새벽부터 그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장로로서 부산의 한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며 연주 기법의 책도 쓰셨다.
고아원의 도서실엔 책들이 가득, 정원엔 온갖 채소며 약초들이 자라고, 돼지며 동물들을 아이들과 키우며 즐거워 하셨다.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있는 컴패션 사무실에 회의하러 올라오실 때면, 미술전과 음악회 일정을 확인하셨다가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해도 음악과 미술을 모르면 야만인이라고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게 말씀하시곤 했다. 음대 교수인 동생, 즉 우리 아버지 덕에 음악회를 무료 가실 수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 오시면 이삼일 머무시며 일보고 미술전, 음악회 다녀온 후 강서면옥에서 냉면 한 그릇 드시고 부산에 내려가시곤 했다. 우리 집에 오시면, 빗자루 달라고 하셔서 “소제” 부터 하시고, 포장지를 정사각형으로 잘라 색종이를 만들어 주시고, 우리 방을 각각 원하는 색으로 페인트 칠해주시고, 교회 페인트칠도 직접하셨다고 까매진 얼굴로 오시기도 했다.
자식들이 정신병원을 시작했을 때, 연로해진 큰 아버지는, 정신병은 사랑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시며, 가족들에게 연락해 신앙 상담을 하고, 환자들에게 신선한 야채를 먹이기 위해 당시 봉고차라고 부르던 밴을 타고 새벽마다 시장에 가서 상인들과 푸른잎 채소를 놓고 흥정을 하곤 하셨다. 내가 미국 오기 직전 뵈러 갔을 때 함께 시장에 가, 상인들이 모두 웃으며 큰아버지에게 흥정 당하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유학이 아닌 이민가는 나에게 공부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꼭 한국을 위해 일하라고 당부하시던 큰 아버지. 당신을 위해서 돈을 쓰지도 모으지도 않으신 그 가난한 손에 이제 미국가면 쓸모없어질 한국 지전 몇 장을 억지로 쥐어드리고 돌아선 것이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는 남동생이 보내 온 큰 아버지의 장례식 비디오. 이제는 성장한 많은 어른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요즘 이 곳 한국 신문을 보면, 상을 타거나 한 자리 차지하지 않으면 루저인 것 처럼 느껴지는데, 어제 발견한 존재감 없는 들러리로 배경에 서있던 큰 아버지가 나는 자랑스럽다. 그 분이 평생 존경하고 사랑한 친구 스완슨 목사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