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저스트 머시를 보고

처음에 레드박스가 등장했을 때 나는 참 좋았다.  단돈 1불에 영화를 빌려다 집에서 편안히 즐길 수 있으니.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가 거의 사라졌다.  레드박스에서 그야말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다.   살인, 폭력, 주술, 프로퍼갠다 등이 난무하는 대부분의 영화는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보면서 실제로 내가 폭행을 당하는 느낌이라 그로부터 나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레드박스는 아무데서나 픽업과 리턴이 가능한 워낙 편리한 시스템이라, 리뷰를 읽어보고 주말에 보통 한편 씩은 빌려다 본다.  놀라운 것은 잘 찾아보면 좋은 영화 1%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영화를 찾을 때마다, 보석을 찾은 듯 기쁘고 감사하다.  어제밤에 본 저스트 머시가 그런 영화였다.   

레드박스의 리뷰가 별 다섯인건 또 처음 보는거라 무조건 빌렸다.  시간을 내 리뷰를 적은 사람들도 참 고맙다.  그 들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갔을 영화.

실화에 근거를 둔 이 영화에서 하버드대 법대를 이제 막 졸업한 젊은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큰 돈을 벌고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대신 알라바마로 가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변호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맡은 첫번째 사건은 1987년 18세의 백인여성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월터 맥밀리언의 변호를 맡았다. 

월터 맥밀런은 전과가 없는 벌목꾼이었는데, 산에서 벌목 작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살인자로 체포된다. 그의 무죄를 입증할만한 증거와 증인이 충분히 존재했음에도,  그를 살인자로 모는 모든 증거는 경찰, 판사 및 변호사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거짓 증인을 만들어 그를 사형수로 만들어 버린다.

법정 통역일을 하는 나는 특히 배심원 재판에 참여할 때마다, 법과 법정이 신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와 동시에 그 신성한 법정에서 거짓된 변호사, 검사, 그리고 증인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만을 증언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엄숙히 선서를 하고 진행하는 재판은 인종이나 사회적 계급 등의 차이에 상관없이, 사실에 근거한 절대적 진리, 즉 범죄행위 여부, 진범, 등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하위법원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연방법원에서는 특히 큰 사건을 다루는 중요한 재판에서, 진리에 입각한 공정한 결정이 내려지도록 기도를 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판사들은 종종 배심원 선정 과정에서, 배심원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특별한 제도이며, 전문가가 아니어도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하고 진실을 알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고 배심원 후보들에게 설명한다.

이 영화를 보며, 나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알면서도 왜곡하여 무고한 사람을 처형시키고자 하는 치밀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갱두목 같은 우리가 보통 범죄자로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법을 수호할 책임을 맡은 경찰서장, 검사, 판사 등의 지도자들 그리고 그 시녀 역할을 하는 지역 언론이라는데 있다.

그들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성에 입각한 것으로, 사적인 이득을 위해 법을 왜곡 또는 변경한다고 해서 법 자체가 신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처럼 정의의 부재를 통해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나올 당시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스는 그가 설립한 비영리 단체   Equal Justice Initiative를 통해  135명의 무고한 사형수를 죽음에서 구해냈다. 스스로 땅에 떨어진 한 톨의 밀알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은 그.  한 인간이 이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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