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신이다.
영화광인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부터 종종 아직 자막도 읽을 수 없는 어린 나를 영화관에 데리고 다니셨다. 주로 서양영화라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딱 한가지만 궁금했다. 아버지 귀에다 대고 “아빠 누가 좋은놈이고 누가 나쁜놈이야?” 하고 묻곤했다. 아버지는 좋은놈이 아니라 좋은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지만, 나는 금방 잊어버리고 오랫동안 “좋은놈”이란 표현을 썼다. 극장에서 나오며 딱 한가지만 궁금했다. “아빠, 좋은놈이 이겼어?”
나는 지금도 그것만이 궁금하다. 누가 나쁜놈이고 누가 좋은놈인가? 좋은놈이 끝에 가서 이기나?
어릴 때는 나쁜놈 좋은 놈 구분이 분명했는데, 신앙을 통해 나를 포함한 인간 모두가 죄성이 있고 의롭지 않음을 알게되었다. 시편 53편에서 다윗왕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내려다 보며, 깨닫는 자, 지각이 있는자와 하나님을 찾는자가 있는가 살펴보니 그들이 모두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도다”라고 써있다.
이를 인정하고 나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흘린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사형수의 변호사가 자신의 클라이언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신 사형을 당한 경우와 같다.
[내가 좋아하는 고호의 [다이닝 룸] 그림을 그려보며, 문마다 피빛로 둘러싸여있는데, 그 피가 이 파티에 초대받기 위한 티켓임을 상징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자주 이용하는 찜질방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천국은 아마도 찜질방 같을거다. 즉, 모두 목욕을 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깨끗해진 사람들이라 같이 있어도 안심할 수 있는 곳. 세상의 찜질방에선 몸만 깨끗하고 속은 시커멀 수 있으나, 천국은 속 안도 목욕해 깨끗해진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일 거라고. 찜질방에서 아줌마들이 쭈욱 둘러앉아 거기 없는 누군가 흉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들 가까이 가지 않는다. 나이들다 보니 그 정도의 지혜는 생겼다. 그런 공동체는 노땡큐다.
모국 한국도, 자유와 평등의 땅이라고 해서 먼 길 떠나 찾아온 미국도, 세상 어느 곳도 안주할 땅이 못됨을 이제는 알겠다. 나는 그냥, 참회록을 쓴 윤동주 시인처럼 마음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런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 뉘우친 전직 나쁜놈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을 그 나라엔 전과자도 흉악범도 있을거고, 심지어 일본인도 있을 것이다.
[큰아버지 임동은의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