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과 하바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시편 119:105

오늘 아침 시편 119편을 읽으며, 어릴 때 본, 미국 드라마 하바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바드 법대 학생들과 엄격한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다른 건 다 잊었지만, 킹스필드라는 무서운 교수님의 계약법에 대한 강의가 흥미로웠다.  사실, 학교 공부에 게을렀던 내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한 것은, 이 드라마를 통해 접한 공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최고의 대학인 하바드대 같은 고풍스럽고 멋진 캠퍼스를 걸어보는 것에 마음이 몹시 끌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인도함이 있지 않았을까?

원하는 하바드대는 못가고 괜찮은 주립대에 들어가 원하던 대로 넓고 멋진 캠퍼스를 걸었고, 난생 처음 공부를 열심히 하며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지만, 교회에서 처럼 대학교에서도 심한 실망을 경험했다.  내가 동경하여 계획한 학문, 즉 진리 추구를 하도록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대적 진리”라는 속이는 이데올로기가 깊숙히 뿌리를 내린 그 곳에서 진리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거부되어 캠퍼스 밖으로 던져지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 119편.  다윗왕이 사랑한 하나님의 법, 규율, 계명, 계약 등에 대해 공부하며, 왜 이 신성한 기둥들이 거부되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동임을.  하나님이 법정에서 스스로 증인이 되어 진실된 증언을 해도, 끌고가 십자가에 처형시킨 행위임을.  예수님인 진리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 시편 119:130.

이  긴 시편을 읽을 때, 내 눈에 뛰어들어오는 이 귀절.  배낭에  넣어 갖고 다니며 읽던 성경책이 나 같이 단순무식한 자에게 명철함 즉, 가짜를 가짜로 보게하는 분별력을 갖게 해주셨던 것이구나.   진리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면 당신의 구멍 뚫린 옆구리도, 손발도 만져보고,  양식이 되어  든든히 채워주시는 구나.   나는 그러니까 그 때 진리가 거부되는 곳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헛수고를 하고 쓸데없이 슬퍼했던 것이다. 예수님 지금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데.

평생을 읽어온 성경은 지금도 읽을 때마다 금괴를 찾듯 더듬는 나의 손에  온갖 금은 보석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 지금까지는 이해가 되든 않되든 술마시듯 쭈욱 들이키고 캬! 좋다! 하고 뛰쳐나가  놀기 바빴는데, 요즘은 잘 쓰여진 존경하는 신학자의 주해서와 함께  배경적인 것도 알아가며 새로운 즐거움을 얻는다.  시편119편 주해서에는 법 체계 및 주요 개념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하바드 법대생 부러울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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